성인이 된 이후로 본가에 다녀오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 명절 같이 부모와 오랜 시간을 보내고 오면 더욱 그랬고, 이런 마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누구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만으로 위로와 위안을 받고 충만함을 느낀다는데 난 도대체 왜 이럴까?
마음속 어디 하나가 고장 난 것이 아닐까?
나의 마음속에는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에게 가지는 원망과 더불어 인정받고 위안을 얻고 싶은 욕구가 공존하고 있다.
왜?
부모는 '자식 잘 되라고 하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무장한 채 항상 자식을 다그치고 못마땅해하며 칭찬에 인색한 것일까?
왜?
자식은 '나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아. 나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부모의 마음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모자란 것 없이 키웠다고 생각하는데 왜 자식은 서운함을 가진 채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을까?'
자식도 알 것이다. 부모로서 노력하고 힘들게 자신을 키웠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놓아버리면 자식의 마음 한곳에 있는 텅 빈 마음, 인정받지 못한 존재의 원망은 누구에게로 향할 것인가? 이 원망을 받아낼 누군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렇다.
나를 키워준 노력과 노고는 알지만 조금 더 바라봐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면 이렇게 구멍 뚫린 내가 되지 않았을 건데 하는 생각. 그런 원망이 남아 있다.
이미 지나가버린 세월을 다시 돌릴 수도 없고, 지금껏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부정해 가며 내가 잘못했다고 자식에게 사과하는 일은 없을 테니 내 마음속에 묻어버리자는 원망.
마음속 깊이 꽁꽁 넣어 잠가둔 그 원망이 부모와 오래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밖으로 터져 나온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부모 앞에서는 항상 걱정거리가 되고 철없는 아이가 된다.
부모 앞에서는 너무도 못하는 것이 많은 못 미더운 자식이 되어 버린다. 부모라는 완성체에 끼워진 부속품, 그것도 불량부속품이 된 것 같다.
그런 부모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스스로 나를 토닥이면서도 내가 먼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관계가 달라질까라는 생각도 한다.
"아버지, 나를 태어나게 해 주고 잘 성장하도록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속에 늘 고마움은 있었는데 인정해 주고 믿어주는 말을 듣지 못해서 원망스러운 마음에 속 좁게 굴었습니다."
"정말 힘겹게 나를 키웠을 텐데 노고를 몰라 주고 삐딱하게 군거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비교와 지적이 아닌 따뜻한 위로와 위안의 말이 필요했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남이 아무리 욕해도 우리 서로만은 위로해 주고 편들어 주는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을까요?"
늘 나의 마음에는 무심했고, 나의 요구는 귀찮아했으며, 나의 행동을 지적하며 항상 본인이 원하는 대화의 길로 들어갔을 때만 말문을 열던 아버지.
항상 그렇게 나를 몰아세우던 아버지 옆에서 잔소리는 많지만 나를 믿고 '아들 밖에 없어'라고 내 편이 되어 주시던 어머니는, 일 년 전 뇌출혈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신 이후에는 전과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죽음의 고비를 넘고 달라지셨다.
항상 한결같은 아버지와 어딘가 달라진 어머니가 있는 본가에 다녀오면 불편하고 무거운 마음에 항상 술을 마셨었다. 하지만 술을 끊은 지금은 며칠 동안 그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런 내가 불쌍하기도 하고 미련하기도 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런 아이 같은 마음이라니...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해 삐진 어린아이의 마음 같다.
하지만 그것이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가장 큰 것이 아닐까?
나를 바라봐 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것.
보기만 해도 마음의 안식을 찾고, 힘들 때면 밥 먹고 이야기만 해도 힘이 생기는 그런 관계.
누구나 그런 부모가 있길 바랄 것이다.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괜찮다고 보듬어 주는 부모를 말이다.
어젯밤 나의 부모에게 생긴 감정을 떼쓰고 우는 아들에게 토해내며 화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려 잠시 밖에 나가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왜 별것 아닌 일에 이성을 잃고 화를 냈을까?
아들의 행동이 나와 같아서가 아닐까?
관심 가져달라고, 할 수 있게 격려해 달라고 온몸으로 요구하는 아이에게 어린 날의 내 모습을 보았나 보다.
그런 아이에게 난 나의 아버지처럼 화를 냈구나. 그렇게 똑같이 대했구나.
갑자기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빨리 아이를 보러 들어갔다.
우는 모습을 보며 나왔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날 보자 아들은 팔을 벌리며 안겨왔다.
꼭 안아주며 "미안해"라고 아이에게 사과했다. 그저 포근하고 충만함만이 가득했다.
가슴속에 안긴 작은 아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런 포근함과 안정감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나의 아들은 어린 날의 내가 되어 나를 치유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치유받고 있다.
그럼으로써 아들 역시 하나의 인격체로 잘 성장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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